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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쏙 드는 글

[좋은 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법


참 좋은 내용입니다.
정신이 버쩍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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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인식 상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 컵 자체가 크기 때문에 크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뚜껑과 비교할 때 크다고 인식되는 겁니다. 컵보다 큰 것과 비교할 때는 이 컵이 작다고 인식됩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의 문제가 아니고 주관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게 진실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뚜껑을 기준으로 하면 뚜껑보다는 컵이 커요. 컵을 기준으로 하면 컵보다는 뚜껑이 작아요. 기준을 뭐로 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말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이 말도 인식상의 오류에 해당합니다. 실제로는 ‘둘이 서로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존중’입니다. 존중은 ‘상대를 받든다’, ‘네가 훌륭하다’ 이런 뜻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둘이 서로 다른데 기준을 나로 잡아버리면, 이것은 옳은 게 되고, 저것은 그른 게 되고, 이것은 맞는 게 되고, 저것은 틀린 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가 틀렸다. 고쳐라’ 이렇게 말하는데 상대는 안 고칩니다. ‘고쳐라’ 하는 생각은 결국 내 식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가 안 고쳐지면 화가 나는 거예요. 화가 나면 내가 힘들어집니다. 상대를 미워해도 내가 힘들어요. 힘이 드니까 ‘그래! 죽든지 살든지, 틀리든지 옳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이러면서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다름을 인정하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화가 나거나 미워지거나 이런 일이 안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같이 살려면 갈등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한 방에서 사는데 나는 ‘덥다’ 그러고 상대는 ‘춥다’ 그래요. 나를 기준으로 하면 ‘너의 몸이 문제다’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아, 저 사람 입장에서는 덥구나’ 하게 되지 누구를 탓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방에 둘이 같이 살려면 어쨌든 조정을 해야 됩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건 아니지만, 조정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나는 약간 더운 것 같은데, 당신이 춥다니까 어떻게 할까?’

이럴 때 제일 쉬운 조정 방법이 상대를 기준으로 나를 맞추는 겁니다. 이 방법이 제일 쉽습니다. 나만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운데 상대는 춥다고 하면 내가 옷 하나 더 벗으면 되고, 상대는 더운데 내가 추우면 내가 옷 하나 더 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나를 버리는 게 인생살이에서 제일 쉬워요. 그런데 우리는 이 쉬운 길을 안 갑니다. 어쨌든 힘든 길을 가려고 해요.


제일 힘든 길은 상대를 고치는 겁니다. 이 방법이 제일 힘듭니다. 상대가 내 마음대로 고쳐지나요? 그런데도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하니까 인생살이가 피곤한 겁니다.

제일 어려운 길은 상대를 고쳐서 나한테 맞추는 거예요. 제일 쉬운 길은 나를 고쳐서 상대에게 맞추는 거예요. ‘나도 좀 고치고 너도 좀 고치자. 중간에서 타협하자’ 이런 세 번째 길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제일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자기가 대단히 양보한 것처럼 반반씩 타협하자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제일 쉬운 길은 나를 버리는 거예요. 그것보다 조금 어려운 길은 중간을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나 상대가 쉽게 양보를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길도 쉽지는 않아요. 만약 내가 힘이 더 세든지, 키가 더 크든지, 아이와 상대하는 엄마라든지 이런 상황이라면, 힘으로 제압해서 그냥 밀고 나가면 돼요. 상대를 고치려면 자기가 힘이 더 세야 합니다. 물론 힘이 세도 상대를 고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저항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엄마한테 덤비고, 남편이 아내한테, 아내가 남편한테 덤빕니다. 이런 저항을 밀고 나가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고치는 걸 한번 시도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가 고쳐지면 다행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고치는 것을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첫째,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한번 조정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밀어붙였더니 상대가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쁜 것도 아니에요.

둘째, 내 의견을 밀어붙였는데 안 받아들여진다면 중간에서 타협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셋째, 그런데 그것도 안 되면 나를 버리면 해결이 돼요. 다른 방법은 나 혼자서 결정을 못 하지만, 나를 버리는 건 언제든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언제든지 자기가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도 ‘뭐, 그거 내가 하지’ 이렇게 자기가 결정을 내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고치는 건 내가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에요. 세 가지 모두 하나의 방에서 잔다는 걸 전제로 할 때 조정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방이 두 개라면 조정 방법이 또 있어요. 나는 이 방에 자고 너는 저 방에 자고, 너는 에어컨 켜고, 나는 그냥 자고, 너는 보일러 틀고, 나는 그냥 자고, 이런 조정 방법도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해가면서 조금씩 조정해 가면 됩니다.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무조건 포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괴롭지가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